여행

‘이제부터 사진을 더욱 사랑할래요’

영봉 2007. 1. 15. 22:50

‘이제부터 사진을 더욱 사랑할래요’


따스한 햇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화사한 5월. 사진을 시작한지 2년 만에 <여성동아>에 공모한 작품이 연도상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이었다.

더구나 부상으로 대반 3박 일 여행을 롯데후지필름과 <여성동아>에서 보내 준다는 점이 설레임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바쁘게 여권수속 서류를 꾸미고 소양교육을 받는 사이 멀게만 느껴지던 5월 29일이 다가왔다. 서울에서 1명, 부산이 다른 해보다 많아 5명, 각 지방에서 4명 등 총 10명. 사업가, 주부, 선생님, 직장인 등 직업도 다양했다.

29일 아침, 시상식을 하고 처음 갖는 해외나들이에 부푼 가슴으로 CAL비행기에 올랐다. 2시간 20분 뒤 목적지인 대만 중정국제공항에 도착했다.

2층 높이는 더 될성 싶은 싱싱하고 푸른 고무나무 사이로 시원하게 내리는 초여름비가 우리 일행을 맞았다.

교포이신 오태호씨가 가이드로 나와 주셨고 이층 버스에 올라 8차선의 잘 다듬어진 공항도로를 1시간 남짓 달리니 수도인 대북시가 어렴풋이 보였다.

커다란 빌딩사이로 판자집이 틈틈이 보이는 것이 신기랬다. 붉은 색이 희망과 기쁨의 상징이라 믿기에 간판과 가정집의 대문이 온통 빨간색으로 색칠되어 있는 점도 이채로웠다.

거리엔 오래전부터의 개방정책 탓인지 외제 고급 중형차가 즐비했고 간간히 우리나라 승용차도 보였다. 가슴이 뿌듯했다.

교통은 대북시도 마찬가지로 막히고 복잡했으나 이곳 사람들 천성이 여유롭고 느긋한 까닭인지 클랙슨 소리는 몇 번 들어보지 못했다.

첫 코스는 대북시에 있는 3백 년 전에 생긴 용산사라는 절이다. 도교형태의 절이라 부처님과 옥황상제 관운장 증 여러 신을 따로 보셔놓았고 섬세하고 화려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낯설지 않은 이웃나라

비가 오는 중에도 경건하게 절을 올리는 선남선녀들의 행렬은 줄을 이었다. 이리저리 색다른 풍경을 찾아 셔터를 눌러대기에 한창인 일행들.

저녁식사는 몽골리안 바비큐라는 요리였는데 각자가 사슴고기 양고기 등의 여러 가지 고기와 야채, 그리고 갖은 양념을 접이에 담아 종업원에게 갖다 주면 대형 프라이팬에 볶아주는데 그 맛이 독특했다.

한국인이 경영한다는 대한백화점에 갔었다. 상아와 비취가 유명하나 하여 상아도장을 몇 개씩 주문하고 아름다운 비취는 눈에만 담았다. 고국에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줄 크고 작은 선물들을 사기에 모두들 바빴다.

다음날 맑게 개이기를 기원하고 자리에 들었는데, 이튿날 아침 설레임으로 커튼을 젖히니 조용히 비를 맞고 있는 도시가 나를 슬프게 했다. 가방속의 필름들이 안타까웠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는 이곳 사람들에게서도 쉽게 들을 수 있었고 관광지의 팜프렛도 한글로 된 것이 많았다.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이웃나라’였다.

중국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고궁 박물관으로 향해
T다. 장개석총통이 중국대륙을 떠날 때 2개 사단의 군인들을 풀어 각지에 있는 보물을 모아 대만으로 가져왔는데 세트로 무려 60만점. 한꺼번에 다 전시를 할 수 없어 3개월마다 보물을 바꾸는데 한 사람이 다 관람하려면 12년이 거린다니 그 규모가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동물의 피로 색칠하여 몇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색치 않는 풍경화, 섬세한 상아로 된 조각품, 값으로 환산한다면 대만인구가 10년 동안 아무런 소득 없이 살 수 있다는 비취병풍 등 그 아름다움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모택동이 대만까지 공산화 시키려할 때 장개석은 고궁박물관의 보물을 폭파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아 민주주의를 지켰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오토바이가 대중 수단

아쉬움을 남기고 대만의 충렬사에 도착하니 입구에 주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교대시간 한 시간 동안 몸은 물론 눈도 깜짝이지 않아 관광객들은 정말 사람인지 확인하듯 만져보고 나란히 기념촬영도 했다. 속눈썹이 유난히 긴 것이 신기했는데 눈을 깜빡이지 않으면 자연히 길어지기 때문이라 했다.

사계절이 뚜렷하지 못해 눈과 낙엽을 우리나라처럼 볼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은 나라다. 일년내내 초록의 울창한 산밖에 볼 수 없다. 산으로 접어든지 1시간 달려 도착한 곳은 산속에서 생활한 몇 가구 남지 않은 토착민마을이었다.

민속의상을 입고 춤과 노래를 불러 플래시를 많이 터뜨리게 했는데 공연 후 춤을 춘 여인과 우리 일행은 잠시 동안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시내로 들어와 장개석 기념관으로 갔다. 20층 높이의 대리석 기념관과 공원식으로 꾸며놓은  넓은 광장은 새벽에는 노인과 학생들이 체조와 디스코를 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저녁식사는 불고기와 여러 가지 김치로 식사를 했다. 호텔로 졸아온 일행은 모처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각자가 갖는 사진관(寫眞觀)과 회사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심지어 자식 걱정도 하는 등   정다운 대화 속에 밤은 깊어갔다.

오토바이 보유대수가 인구 2천만에 7백만대. 지하철이 완비되지 않은 상태라 오토바이가 대중교통수단이었다. 직장여성과 어린 학생들까지도 오토바이를 몰고 다녔다.

그리고 빌딩 사이사이의 공간은 오토바이의 주차장으로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오토바이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머무는 동안 텔레비전뉴스와 신문은 연일 톱기사로 중공의 민주화 운동을 다루었고 대학 정문에는 지지 대자보가 벽을 메웠다. 이념으로 분단된 우리와 같은 처지의 대만. 멀리서 느끼는 남의 나라 아픈 현실이었지만 일행을 잠시 침울하게 만들었다.

카메라 가게에 들러 카메라와 부속품을 구경하거나 필요한 것은 구입도 하고 북해안으로 갔다.

용암이 식어 굳어진 모습의 많은 봉우리들 가운데 머리와 옆얼굴이 여왕 같다하여 여왕봉이라 불리는 봉은 정말 여왕 같아 보였다.

맑을 때도 비가 온다는 우기지역이었고, 폭풍우와 바위에 부서지는 흰 파도는 정말 장관이었다.

우산과 카메라를 든 일행은 옷이 흠뻑 젖어 날아가진 않을 것이라며 움푹움푹 들어간 구멍들을 만져보고 카메라 앞에서 웃어 보이기도 했다. 젖은 옷을 어찌할 수 없어 앉지도 못 하고 서성거렸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곳이었다.


검소한 생활모습 돋보여

화명산 유황온천 입구에서는 계란과 메추리알을 사서 올라갔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멀리 산을 바라보면 골짜기에서 흰 연기가 드문드문 올랐는데 그것이 모두 온천이라 했다.

조금만 땅을 파면 유황온천이 솟는다니...

계곡을 오를수록 하얀 연기는 계곡 골짜기를 감추고 있었고 징검다리처럼 돌을 놓아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옆에는 부글거리는 물이 끓고 있었다.

어느새 삼일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있었다.

며칠 더 머물며 좋은 사진을 찍자는 의견도 나왔다. 젓가락으로 꽂아 표시해둔 계란과 메추리알이 익어 물에 뜨고 있었다. 먹으면 장수한다는 말에 모두 한입씩 먹었고 북해안에서 젖은 옷을 다 말렸다.

다음 코스는 남대문시장과 견준다는 대만의 야시장. 일행은 나뉘어져 택시를 타고 그곳을 찾았다.

긴 통로로 된 양 옆에는 옷가게, 횟집, 과일장사 증은 물론 뱀장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시계가게 앞에 전시된 시계를 구경하는데 주인이새겨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그리고 이런 많은 깨달음을 주신 <여성동아>와 후지필름 측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한다.  우리말로 “들어오세요”한다. 우루루 따라가는데 어둡고 으슥한 지하로 한참을 갔다.

탁자 위 여러 개의 열어둔 가방에는 수백 개의 시계가 있었다. 부르는 값에 반씩 깎아 하나씩 구입하여 그 긴 통로를 다시 빠져나왔다.

야시장엔 동양인보다 흑인과 백인이 더 많았고 우범지역이라고 잔뜩 겁을 주어 손을 꼭잡고 서로를 놓칠세라 두리번거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작은 트럭들 위엔 전등에 비쳐 고운 빛을 내뿜고 있는 처음 보는 과일들 앞에서 그동안 익힌 말솜씨로 흥정을 하며 밤맛나는 호두같이 생긴 열매를 샀다.

벅적거리기 시작하는 야시장에서 빠져나온 뒤 번화가로 발길을 옮겼다.

백화점엔 국산보다 수입품이 더 많았고 여성옷은 한창 통바지가 유행이었다. 화장품코너도 눈에 띄게 많아 보였다. 그러나 지나가는 여성들에게서는 검소하고 편한 느낌이 풍겨왔다.

가로수가 야자수로 된 대북시에서 야행의 마지막 밤을 아쉬움 속에서 보냈다.

대만에서 가장 인상 깊게 느낀 것은 결혼한 여성들도 대부분 직업을 가져, 하루 세끼 모두 외식을 한다는 점이었다.

아침 출근길에 버스와 거리에서 빵을 먹는 사람들도 많았고 형식을 따지지 않고 실용적으로 생활하기 때문인지, 제법 고급스러운 식당의 사기 숟가락과 접시 모두가 이가 나갔고 플라스틱 그릇은 열로 일그러져서 우리 같으면 버렸어도 한참 되었을 것이었지만 식탁에 떳떳하게 오르곤 했다.

호텔의 물컵까지도 이가 나간 것이 놓여있었는데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문득 이런 것들이 모여 대만이 잘사는 나라가 되는데 뒷받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시간이 빨라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호텔 로비에서 서로의 연락처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동안의 나눈 정을 기념하여 동아살롱의 모임도 만들자며 의견을 교환했다.

짜여진 생활의 단조로움을 깨뜨려줄 새로운 활력소를 찾고 있던 나에게 이번의 대만 여행은 많은 추억과 기쁨을 주었다.

이제 사진을 더욱 사랑하고 배울 것을  새겨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그리고 이런 많은 깨달음을 주신 <여성동아>와 후지필름 측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한다.

 

# 이 글은 1989년 제5회 '독자사진 콘테스트'연도상 수상자 10명의 대만 3박4일 촬영 기행문으로 여성동아에 실렸던 글입니다. 함께  여행을 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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