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지리산 당일 종주

영봉 2006. 5. 30. 17:48
 

지리산 당일 종주기 (천왕봉~노고단)


  지리산을 종주 한다니까 모두들 누구는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5시간만에 종주 했다느니, 7시간만에 종주 했다느니 자랑이 대단하다. 지리산 종주를 자기의 체력을 남에게 과시하는 무슨 스포츠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산행은 어디까지나 산행 그 자체이어야 한다. 일주일 내내 일하고 모처럼 휴일을 맞아 스트레스도 풀고, 다음주를 위해 재충전도 할 겸 산을 찾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신의 몸 망가뜨리려고 산행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과격한 운동은 몸에 무리가 따르기 마련인데 자신의 몸에 알맞은 산행이 가장 좋은 산행이라 여겨진다. 산행을 하면서 가족, 친구 또는 동료들과 같이 가정이나 직장에서 못 다한 얘기도 이런 기회에 허심탄회하게 나누면서 자연의 아름다움도 함께 즐기는 산행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의 활력소가 되는 것이다.


  6월 17일.

간밤 몇 차례나 잠에서 깨었다. 이러다가 깜빡 잠이 들어 깨어보니 2시 반. 새벽 3시에 출발하려면 2시쯤 일어나 짐을 챙겨야하는데 황급히 서둘러 약소장소인 북파 앞으로 향했다. 오늘은 지난해 지리산을 당일로 야간종주 한 적이 있는 세 사람이 이번에는 당일로 주간 종주하기로 한 것이다. 달라진 것은 지난번에는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종주했지만 이번에는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 종주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세 사람이 택시로 이동해야할 것 같아 내 차로 출발하기로 하여 차를 가지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약속한 3시에 세 사람이 만나 깜깜한 밤 공기를 가르며 지리산으로 향한다. 중산리로 달리는 도로엔 차량통행이 거의 없다. 가는 도중 등산객을 태우고 가는 봉고 한 대와 등산객을 실어다주고 되돌아오는 대형 버스 한 대만을 만났을 뿐이다.


  출발한지 45분만에 매표소 아래 주차장에 도착했다. 많은 등산객들이 야간산행 금지로 입장을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매표소에 문의하니 4시 반이 되어야 개방하는데 오늘은 4시에 개방할 테니 시간이 될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란다. 4시 정각, 시간이 되자 바리케이트를 치우고 매표를 시작한다. 입산이 허용되어 캄캄한 밤이라 랜턴을 켜고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칼바위를 지나고 망바위를 반쯤 오를 무렵 먼동이 트이기 시작하더니 곧장 날이 밝았다. 중산리 2.4Km, 천왕봉 3Km인 곳에 있는 망바위에서 가파른 경사길을 올라오느라 힘들어 잠시 땀을 식히며 쉰다.

법계사에 올랐을 때는 벌써 해가 저만치 솟아 올라와 있었다. 멀리 산등성이를 감싸고 있는 구름바다를 내려다보며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그사이 해는 어느새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개선문을 지나고 천왕샘에 올라 한 모금의 물을 들이키고는 곧장 천왕봉으로 올랐다. 천왕샘에 물 구경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데 물이 있는 걸 보니 오늘의 종주길이 순조롭게 끝내지려나?


  6시 45분 천왕봉(1,915.4m)에 올랐다. 이른 아침인데도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쌀쌀한 바람을 피해 바위틈새 웅크리고 앉아 허기를 달래고 있다. 천왕봉을 오르는 동안 시장기가 들어도 참고 올라왔건만, 천왕봉에서 쌀쌀한 바람을 맞아가며 식사하기란 어려울 것 같고 해서 아침 식사는 장터목에서 하기로 했다. 내리막길인지라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것 같아 배고픔을 그대로 참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통천문( 1,890m)을 지나고 제석봉을 올라 고사목 지대를 내려가면서 저 멀리 반야봉(1,733.5m)과 노고단(1,507m)을 바라보니 우리가 언제쯤 저길 지나치나싶어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세 사람 모두 단단한 각오로 종주길에 오르긴 했으나 자신 있게 해낼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오로지 자신의 대담한 용기와 끈기 그리고 정신력만이 오늘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7시 23분 장터목에 도착했다. 어젯밤 야영한 사람들로 취사장은 발 디딜 틈조차 없다. 바깥 공터에 자리를 잡아 준비해온 김밥만으로는 한기를 느낄 것 같아 대피소에서 판매하는 따끈한 컵라면을 곁들여 아침을 먹었다. 빈속에 4시간 넘게 산행을 하고 나서인지 그 맛이란 진수성찬도 이 보다 나을 수 있을까?


  갈 길이 아득한데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여야 한다. 식사하는데 고작 20여분만에 끝내고 장터목을 출발했다. 일요일이라 등산로엔 제법 사람들이 붐빈다. 특히 종강한 대학생 젊은이들이 눈에 많이 띈다. 등산로 양측으로 무성한 수풀이 마주치는 두 사람이 서로 비껴가기엔 몹시 힘들다. 단체팀이 지나칠 땐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된다. 촛대봉을 오른 후 8시40분에 세석대피소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장터목에서 세석대피소까지 50분이면 갔었는데 오늘은 55분 넘게 걸렸으니 이 몸도 이제는 많이 늙은 건가?

세석에서 장터목까지는 3.4Km, 선비샘까지는 6Km이다. 그러니까 하산 길 3.4Km를 한 시간도 안 걸렸으면 잘 가는 게 아닌가싶은데․․․


  세석에서 영신봉을 지나고 칠선봉을 올라서니 저 멀리 바라보이는 반야봉 아래로, 하얀 구름이 띠를 둘러 봉긋한 두 봉우리가 마치 여인의 가슴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배낭 속의 카메라를 얼른 꺼내어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진지하게 담는다. 자꾸만 달라지는 구름 모양을 계속 지켜볼 수만 있을 수 없어 산행하면서 또 찍기로 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다시 반야봉이 시야에 들어왔을 땐 반야봉을 감싸고있던 구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세석을 출발한지 한 시간 넘게 지난 10시 4분 선비샘에 도착했다. 지난해 여름 야간 종주하면서 한밤중에 이곳에 도착하여 물을 마신 기억이 새롭다. 날이 가문 탓인지 샘은 물이 조금밖에 안나와 줄을 서서 물을 받는다. 연하천에 가면 물이 풍부하지만 혹시 만일을 대비하여 물을 충분히 준비했다. 마침 집에서 준비해 온 냉장고엔 얼린 식혜를 마시니 달고 시원한 팥빙수 마냥 입안에 사각거리는 얼음 조각의 촉감이 너무 좋다. 다 비운 통에도 물을 가득 담았다. 배낭에 두 병의 물을 넣고는 선비샘을 출발하여 벽소령으로 향했다. 여기서 벽소령까지는 2.4Km. 덕평봉(1,521.9m)을 지나고 평탄한 차량 통행이 불가한 옛날 작전도로를 한참 가다가 벽소령대피소를 만난다. 대피소에 도착하여 떡 몇 조각을 간식으로 먹고는 갈 길을 재촉한다. 출발한지 지금까지 7시간이나 지나서인지 점점 힘이 들어 보인다.


  11시 11분 벽소령을 출발한지 30분이 지나 형제봉(1,443m)에 다다른다. 골짜기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5.6분을 쉬다보니 한기가 느껴진다. 삼각봉(1,462m)을 올라 10여분 지나자 반갑게도 연하천의 철책이 보이기 시작한다. 12시 30분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엔 점심을 먹는 사람들로 꽉 차있다. 그늘을 찾아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으려해도 마땅한 장소가 없다. 샘에는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데, 식수가 넘쳐 흘러가는 물이라고 여기에다 발을 담그거나 세수를 하는 둥 꼴불견이 한 둘이 아니다.

연하천샘에서 오는 도중 다 비운 식수통에 물을 가득 채운다. 명선봉(1,586m) 오르는 300개의 나무계단을 올라 빈터 그늘에서 점심을 먹었다. 배를 채우고 나니 스르르 잠이 쏟아진다. 간밤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다. 밥 먹는 시간에는 쉬는 시간이래야 따로 없다. 그러니 더 이상 쉴 수는 없고 그저 시간이 되면 걷는다. 한 걸음이라도 더 목적지를 당겨 두어야 한다.


  명선봉에서 토끼봉 쪽으로 내려가는 위험한 곳을 지난해에 57개의 나무계단으로 공사를 해두어 자칫 안전사고가 나기 쉬운 곳을 잘 정비해두었다. 한 봉우리(1,463m)를 올랐다가 내려가니 이번에는 힘들다는 토끼봉(1,537m)m)을 만났다. 체력은 차츰차츰 쇠약해져 오르막길을 오르자니 한발한발 힘이 든다. 이 봉우리만 오르면 앞으로 삼도봉 하나만 더 오르면 오늘의 종주에서 아주 힘든 곳은 끝난다는 생각으로 사력을 다해 토끼봉을 올랐다. 내려가는 길도 오르는 길만큼이나 그리 수월한 건 아니다. 10시간 가까이 걷다보니 발가락이 약간 아프다. 거기에다 발바닥도 열이 나는 모양이다. 지루한 내리막길을 조심스레 걸어 2시 15분 화개재에 내려섰다. 연동골에서 불어오는 골짜기의 시원한 바람을 쐬며 멀리 남쪽으로 로 뻗어있는 불무장등(1,446m)을 바라보니, 지난 번 목통에서 이곳으로 올라와 삼도봉을 거쳐 불무장등을 타고 황장산, 촛대봉을 지나 조동으로 종주한 기억이 새롭다. 이제 삼도봉(1,550m)만 오르면 오늘 힘든 봉우리는 끝이다 생각하고 550개의 나무계단을 오른다. 마지막 남은 노고단까지의 산행을 위해 체력 안배를 하지 않을 수 없어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계단을 오른다.


  2시 40분 마지막으로 힘든 삼도봉을 올랐다. 잠시 쉬는 둥 마는 둥하고는 곧장 길을 재촉한다. 여기서 노고단까지는 약 2시간 거리다. 노고단이 점점 가까워지니 지나치는 등산객들이 부쩍 많다. 노루목을 지나고 임걸령에서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샘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계속해서 걷고 또 걷는다. 이제 쉴 시간도 없다. 땀이 비오듯해도 더운 줄을 모르겠다. 지친 발걸음이 돌뿌리에 부딪쳐도 아픈 줄을 모르겠고, 쉰다고 자리에 앉기라도 하면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화개재에서 10분 가량 앉아서 쉰 이후 줄곧 쉬지 않고 걸어 4시 30분 드디어 오늘의 종착지 노고단에 도착했다. 노고단에 도착하기 전 지루한 등산로를 오는 동안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노고단의 철책을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지 기다림의 행복을 모르는 사람은 이 맛을 어찌 알리오. 두 시간을 쉼 없이 걸어온, 아니 새벽 4시부터 산행을 시작하여 12시간 반 동안을 꼬불꼬불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지나온 아득한 발자취를 되새기며 과연 해냈구나 하는 뿌듯한 감정을 가눌 길이 없다.


  오늘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의 25.5Km. 이 거리는 지리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 실측한 거리라고 한다. 어떤 지도상에는 34.3Km, 산행 소요시간은 13시간이라고 되어있다. 오늘 우리는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약 9시간 30분만에 종주한 셈이다. 종주 시간이 길고 짧은 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당일 종주를 한데 그 뜻을 부여하고싶다. 당일 종주를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해낸 당일 종주는 세 사람 서로간의 호흡이 맞고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있어서 무사히 끝내게되었다. 당일 종주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랄지 모르지만 우리같이 50대 후반에는 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해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당일 야간산행 시에도 무사히 종주를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세 사람 모두 애썼다. 서로를 북돋워주고 위로함으로써 안전산행을 하게 되어 한량없이 기쁘다. 나와 같이 지리산 종주를 해준 두 사람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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