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거림-세석대피소-촛대봉-연하봉-장터목-칼바위-중산리
새벽 일찍 일어나 보니 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다. 단풍을 즐기는 데는 비가 오면 어떠랴싶어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선다. 여느 때와는 달리 오늘은 좀 느지막하게 출발했다. 거림에 도착하도록 가을비는 계속해서 내린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들녘은 지난주까지만 해도 황금물결이었는데 수확이 끝난 지금은 쓸쓸하기만 한데 가까이 다가오는 지리산은 구름에 포근히 쌓여 그 자태를 드러내 보여주질 않는다. 주차장에 차를 정차시키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우리의 바램을 저버렸다. 30분 가량 차안에서 기다리다가 우의를 꺼내 입고 빗속에 산행을 하기로 했다.
산으로 오르는 사람은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 등산로 초입에 있는 매표소를 지나 본격적인 단풍 사냥이 시작된다. 비가 많이 내렸던지 계곡에는 제법 많은 물이 콸콸 흘러내린다. 노랗고 빨간 단풍잎이 내리는 비에 젖어 더욱 선명한 색깔을 자랑한다. 바람은 불지 않으나 나뭇잎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낙엽 위에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성급한 단풍잎은 바위에 떨어져 빗물을 머금어 반짝거리고, 길 위에 떨어진 낙엽은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부스러진다. 아름답게 빛이 나는 단풍을 넣어 계곡을 배경으로 몇 차례 카메라에 담아본다. 황홀한 지경의 단풍에 매료되어 폭포를 촬영하다 바위에 미끄러져 뒤로 넘어졌으나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다.
매표소를 통과한지 50여분이 지나 세석 2.6㎞, 거림 2.4㎞ 지점을 지나 9시43분 천팔교를 지난다. 등산로는 계속해서 울긋불긋한 낙엽으로 깔려있어 지나가는 나그네의 마음을 한결 가뿐하게 해주어 지칠 줄을 모른다. 철계단을 올라 9시 57분 북해도교(1,050m, 세석2.8㎞, 거림3.2㎞)에 도착하여 물 한 모금으로 땀을 식힌 후 곧바로 출발한다. 사방이 단풍 숲으로 눈을 현혹시킨다. 계곡을 벗어나자 가파른 계단길이 시작된다. 10여분을 힘들여 오르니 완만한 능선길이 나타난다. 오르는 도중에 오늘 처음으로 세석에서 하산하는 등산객을 만났다.
10시 20분, 세석 2.1㎞, 거림 3.9㎞ 지점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낙엽이 덮인 웅덩이의 물을 한 잔 떠 마시고는 바위에 걸터앉아 피로를 푼다. 땀이 식어 한기를 느껴 다시금 산을 오른다. 미끄러운 바윗길을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며 세석교(세석1.3㎞, 거림4.7㎞)을 지나 어느새 대성동으로 하산하는 갈림길(의신8.6㎞, 세석0.5㎞, 거림5.57㎞)을 올라선다. 세석대피소를 오르기 전 샘에서 시원한 물을 마신 후 11시 14분 대피소에 닿았다. 대피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취사장을 따로 두고 휴게 공간에서 취사를 하는 사람, 한편에서는 식사를 하는 사람,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손을 녹이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12시도 안 되어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장터목대피소까지 가서 점심을 먹자니 비가 계속 내리니 아무래도 장터목대피소 안이 붐빌 것 같아 여기에서 식사를 하기로 한다. 그래서 이들 틈에 자리를 잡아 이른 점심을 먹으려하나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추위를 느껴 취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취사장은 텅 비어 있었다. 바람이 없는 취사장에서 맛있게 식사를 끝냈다.
비는 계속 내린다. 12시 5분, 장터목을 향해 출발한다. 식사를 막 끝내고 촛대봉(1,730m)을 오르자니 쉬 숨이 차다. 구름으로 덮여진 지리산은 겨우 가까운 주위만 보일 뿐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다. 촛대봉에 올랐다. 여기서 세석 0.7㎞, 천왕봉 4.4㎞, 장터목은 2.7㎞이다. 시간이 얼마 안 걸려 장터목에 닿을 것 같은데도 제법 힘이 든다. 촛대봉을 떠난 지 한 시간 만에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대피소 취사장에는 사람들로 꽉 차 들어설 공간조차 없다. 13시 20분, 대피소에서 쉴 필요도 없고 곧장 중산리로 하산하기로 한다. 단풍의 절경을 실컷 담으려고 내려가는 길엔 한 걸음이라도 빨리 내려가기로 한다. 13시 40분 명성교를 지나고 곧 이어 병기막터교(장터목1.0㎞, 중산리4.3㎞)를 지나 앞서가는 사람들을 제치고 유암폭포에 당도한다. 계곡의 물이 불어 폭포의 물줄기가 굵게 흘러내리지만 주변에 나무라고는 없어 무의미하나마 폭포수 하나만을 넣어 한 커트 담아둔다. 폭포를 지나고 바위계곡의 나무다리를 지나서부터 단풍이 절정이다. 단풍나무 단풍보다 샛노란 활엽수 단풍이 유난히도 빛난다. 계곡을 따라 아름답게 우거진 단풍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아본다. 단풍만 쳐다보며 하산하다보니 어느새 칼바위에 도착한다. 15시 칼바위를 그냥 지나쳐 계속해서 중산리로 하산하다가 중산교 다리 위에서 계곡 위쪽을 바라보니 빨간 단풍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게 아닌가? 얼마 남지 않은 필름을 마지막으로 찍어둔다. 카메라를 챙겨 넣고 15시 30분 매표소에 도착하여 오늘의 단풍산행을 끝냈다.
맑게 갠 날 보다 이렇게 비오는 날 산행도 산행이지만 단풍 색깔이 햇빛에 역광으로 보는 것보다 빗물에 깨끗이 씻긴 단풍이 훨씬 아름답다. 비를 맞으며 사진을 찍는 것도 청승이지만 그런 대로 재미가 있었다. 잘 찍어보려고 바위에 올라서다 미끄러져 뒤로 넘어졌지만 내가 안 다치는 것보다 카메라 안 다치게 하려고 몸을 구르는 나를 발견하고는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카메라가 뭐 길래... 하지만 비가 오는 가운데서도 카메라에 습기가 찰까봐 조심스레 다루고, 비에 젖는 카메라의 물기를 부지런히 닦아가며 나름대로 열심히 촬영을 했다. 이래저래 찍다보니 두 통씩이나 찍었지만 과연 쓸 만한 사진이 나올지 궁금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촬영을 할 수 없었던 점이다. 산행을 목적으로 촬영을 하다 보니 시간에 쫓겨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런 만큼 이만한 소득도 내게는 소중한 자산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