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지리산

영봉 2006. 9. 7. 19:03
 

지리산

중산리- 법계사-천왕봉-제석봉-장터목대피소-세석대피소-거림


  2000년 12월 31일.

밀레니엄 첫 해 일출을 보려고 새벽 4시에 출발하여 남해엘 갔었다가 일출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시간을 차에서 시달리는 고생을 하였었다. 그 이튿날 새벽엔 지리산 일출을 보겠다고 세석고원엘 올랐지만 눈과 비, 게다가 우박까지 맛보는 산행을 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다녀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니 정말 세월이 빠르기도 하다.


  2000년 마지막 일출을 보기 위해 다섯 사람이 지리산엘 가기로 이틀 전 약속을 했었다. 새벽 2시 40분 집을 나서 45분 경 재철의 차를 타고 북파 앞으로 향했다. 장룡이는 먼저 나와 있었으나 규태는 약속시간을 조금 넘겨 도착했다.

3시 7분 북파 앞을 출발하여 국도로 원지를 지나 중산리로 향했다. 이른 새벽이라 차량의 통행이 거의 없는 시간이라 45분쯤 걸려 3시 52분에 중산리 매표소 주차장에 도착했다. 배낭을 메고 산행을 시작하려 매표소엘 들리니 5시부터 입산시킨다고 못 들어가게 하는 게 아닌가? 오늘만큼은 한 시간 먼저 들어갈 수 없느냐고 통사정을 해도 들어주질 않았다. 장룡이가 담당자와 얘기하는 사이에 슬그머니 입구를 비껴 숨어들었다. 이때가 새벽 4시. 안 들여 보내주는 것을 잠시 양심을 저버리고 깜깜하게 어두운 도로를 걸어 등산로에 접어들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나머지 일행도 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계속해서 숨어들었단다. 사방이 깜깜해 등산로에서부터 헤드램프를 켜고서 천왕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나보다 먼저 아무도 안 올라간 줄 알았는데 오르는 도중 20명 이상의 등산객들을 만났다. 이 사람들 모두가 매표소 옆으로 해서 몰래 올라 온 것이다.


  4시 25분 칼바위를 지나고 철다리를 건너기 전에 칼바위아지트를 잠시 둘러보고는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4시 45분 망바위를 지나 5시 25분 법계사에 도착했다. 서서히 헤드랜턴의 불빛이 희미해지더니 드디어 깜깜하게 되어 준비해 간 건전지로 갈아 끼우는데 두 개만 갈아도 환하게 밝기에 머리에 다시 쓰고는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건전지 4개를 다 갈아줘야 하는데 급한 대로 두 개만 갈다보니 채 5분도 지나지 못해 불빛이 약해져서 부득이 두 개를 마저 갈아 끼워야 했다.

법계사 위부터는 약간의 잔설이 깔려있었다. 그렇지만 아이젠을 할 정도는 아니다. 천왕샘을 지나 천왕봉 바로 밑을 오를 때 동녘 하늘은 시커먼 구름 띠를 만들어 그 위로 서서히 붉은 노을이 그려졌다. 날이 조금씩 밝아지자 랜턴을 끄고서 사력을 다해 6시 50분 드디어 천왕봉에 올랐다. 중산리에서 처음 출발하면서부터 거세게 바람이 불었는데 여전히 계속해서 매서운 겨울 눈바람이 불어와 정상을 지날 때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발걸음을 옮기기가 매우 힘들었다.


  일행과는 장터목대피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터라 혼자 제석봉으로 향했다. 길이 눈으로 얼어 미끄러운지라 새로 산 아이젠을 찼다. 노을이 점점 붉어지는 가운데 일출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걸었다. 7시 20분 경 때 맞춰 제석봉에 도착하여 카메라를 꺼냈다. 찬바람이 사납게 몰아 부쳐 바위 곁에 붙어 서서 간신히 몇 장면을 촬영했다. 선명한 모습의 태양도 아니지만 올 해 1월 2일 그리고 1월 16일 두 차례나 왔어도 일출 장면을 보지 못했는데 그나마 흔적은 남길 수 있었다. 장갑을 꼈는데도 손가락이 시려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녹여가며 애써 몇 장을 찍었는데 천왕봉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별로 긴해도 그냥 찍어 두었다. 해는 둥그렇게 구름 위로 솟아오르고 계속해서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제석봉에서의 사진 촬영을 포기했다. 손가락이 동상이 걸릴 정도로 손가락 끝이 아팠고 게다가 카메라에 내장된 수은건전지까지 얼어 노출 측정이 힘들 정도였다.


  체감온도가 영하20도 이상의 추위 속에 촬영을 그만두고 장터목대피소로 향했다. 8시에 대피소에 도착하여 일행이 오기를 기다렸다. 바깥은 여전히 강풍이 불어 사진 촬영도 포기하고 대피소 안에서 무작정 일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10시가 지나서야 일행이 도착했다. 대피소의 취사장엔 등산객들로 붐벼 시끌벅적했다. 이 복잡한 가운데 틈새를 비집고 바닥에 자리를 잡아 떡국을 끓였다. 떡국을 먹으며 내가 가져온 매실주를 반주로 한 잔 마시니 얼큰한 술기운이 추위를 싹 가시게 했다.

10시 50분, 대피소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강풍이 꺾이질 않았다. 여기서 장룡이와 나는 정근, 재철, 규태 세 사람과 헤어져 세석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장터목에서 중산리로 우리 둘은 세석을 거쳐 거림으로 나누어져서 거림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세석으로 향하는 길에 천왕봉을 뒤돌아보니 아침 햇살에 눈꽃이 다 녹아버려 언제 눈꽃을 피웠나 싶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추위 속에 동감이라도 날지언정 몇 장 찍어두는 건데 그냥 포기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렇게 쉬 녹아버릴 줄은 몰랐다. 지나가는 길에 석화나 설화를 배경으로 몇 차례 찍긴 했지만 혹시 쓸만한 작품이 하나쯤 나올는지 기대가 된다.


  11시 55분 촛대봉에 도착하여 천왕봉을 바라보니 아침에 본 하양 세상은 온데 간데 없고 앙상한 바위만 우뚝 솟아있다. 아침 햇살에 다 녹아버렸다. 12시 8분 촛대봉을 떠나 10분쯤 걸려 세석대피소에 닿았다. 대피소에서 잠깐 쉬는 사이 뒤따라오던 장룡이가 먼저 하산했는지 보이질 않았다. 3분도 못 쉬고 급히 서둘러 배낭을 메고 거림으로 하산했다.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 붙으려고 발길을 재촉했지만 보이질 않았다. “하”하고 두 차례나 불러보고 호루라기를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다. 조금 내려가니 거림과 대성골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도달했다. 눈길은 대성골로 하얗게 잘 나 있었다. 자칫하면 대성골로 갈 뻔했다. 왜냐하면 거림으로 향하는 길은 큰돌을 깔아 만든 길이라 눈이 녹아 등산로처럼 보이지 않으니 자칫하면 잘 못 알고 지나치기 십상이었다.  내가 먼저 내려가나 싶어 천천히 거림으로 향했다. 혹시 나보다 먼저 내려간 흔적이라도 있나싶어 유심히 살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오후 1시 5분 경 해발 1,090m 고지에서 10분 정도 쉬었다. 행여나 나보다 뒤에 내려올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기다린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질 않고 천천히 하산하기로 했다.

2001년 새 해 첫 일출을 보러 올라오는 사람들을 더러 만났다. 1시 25분 세석에서 3Km라는 이정표를 지나고 1시 25분 거림 2Km를 지났다. 아무래도 장룡이가 먼저 간 것 같아 여기서부터는 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오른쪽 무릎에 약간의 통증이 왔다. 지난번 덕유산에서 느낀 통증이 다시금 느껴지는 걸 보니 관절이 약간 무리가 온 것 같다.


  2시 15분 드디어 거림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보다 먼저 와 있어야 할 장룡이는 보이질 않는다. 중산리로 내려간 팀도 보이지 않아 어디 적당한데 쉴 곳이 없어 주차장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20여분이 지나 장룡이가 내려왔다. 내가 먼저 내려와 있는 걸보고 혼자 달아났다고 뭐라고 한 소리 할 줄 알았는데 도착해서 한다는 말이 자기는 삼거리에서 길을 잘 못 들어 대성골로 가다가 되돌아 오는 바람에 늦었다고 했다. 분명히 이정표를 보고 거림으로 내려온다는 것이 무심코 눈길따라 대성골로 갔었단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둘이 만나 조금 내려서니 장터목대피소에서 중산리로 바로 하산해 오는 중산리 팀을 만났다. 그들도 지금에야 도착한 것이다. 트렁크에 배낭을 싣고 조금 내려오다 거림 버스주차장에 있는 가게에서 동동주 한 잔씩 마시고는 4시에 진주로 향했다. 오늘의 겨울 강풍 속에서 2000년 마지막 산행은 지리산에서 이렇게  모두들 안전하게 마치고 귀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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