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월출산에서<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나 오늘 월출산에 올라보니,
발아래 밟히는 것은 구름이라
신선들과 함께 천상에서 노닌다.
운무와 더불어
벗과 건네는 한 잔의 술은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행복.
여보게,
무릉도원이 바로 여기 아니겠는가?
이슬을 머금은 진달래는
바위틈에 숨어 얼굴을 붉히고,
시샘하는 봄바람은
수천길 낭떠러지를 밀어 올린다.
눈앞에 보이는 건
오로지 신선들의 놀음
한 순간이나마
선경에서 놀아난 꿈을 깬다.
오랜만에 가보는 월출산이다. 밤새도록 비가 내리더니 오늘 아침에도 계속해서 가랑비가 내린다. 비를 맞으면서 산행을 할 차비를 하고 칠암캠퍼스로 향했다. 7시 반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택시 편으로 도착해보니 많은 인원이 먼저와 기다리고 있다. 당초 약속을 하고서 오늘 못 오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40명이나 되는 인원을 태운 버스는 20분가량 늦은 7시 50분에 월출산을 향해 출발한다. 비가 오는 오늘 같은 일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산악회가 발족된 이후 최대의 회원이 참석하여 회장, 총무는 그저 신바람이 나나보다. 나 역시도 버스를 가득 메운 회원들의 많은 참여를 보고 더없이 기뻤다. 그동안 회장, 총무가 고문들과 함께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내어 노력한 결과 70명이라는 많은 회원을 가진 동호회로 키워낸 것이다. 회장과 총무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비는 월출산 도착하기까지 계속 내린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출발하여 광양을 지나 벌교, 보성을 거쳐 11시 2분 경 월출산 천황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오는 도중 4차선으로 잘 닦여진 국도를 지날 땐 거침없이 신나게 달리더니만 아직 완공되지 않은 구간은 종전대로 2차선 도로라 약간의 흔들림을 느낀다. 김이 뿌옇게 서린 차창을 닦아가면서 창밖으로 스쳐 지나는 신록을 즐기며 혼자 콧노래를 불러본다. 얼마 만에 만나는 즐거움인가? 일상에서 쫓기다가 오늘 하루를 위해 바쁘게 움직여온 셈이라 나름대로 행복을 느끼는 듯하다.
오늘의 산행을 축복이라도 하는지 산행을 시작하려니까 비가 멎었다. 오늘 당초 계획된 산행은 천황사에서 천황봉을 올라 도갑사로 하산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날씨 관계로 천황봉을 올랐다가 되돌아오기로 결정하여 비 온 뒤 미끄러운 산길을 무리하지 않기 위해 안전한 산행을 하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에 전원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은 후 천황봉(809m)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도로를 꽉 메우듯이 길을 오르다가 등산로로 접어들면서 한 줄로 길게 줄을 지어서, 숨을 헐떡거리며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15분쯤 오르니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쳐지기 시작한다. 갈림길에서 바람골로 오르느냐, 아니면 구름다리를 지나 사자봉을 거쳐 천왕봉을 오르느냐로 망설이다가, 결국 구름다리 쪽으로 오르기로 하여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오른다. 산행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바람폭포 쪽으로 오르는가 했더니 나중에 정상에 오르고 보니 일행 모두가 구름다리 쪽으로 올랐다고 한다.
비가 내린 직후라 곳곳에 질퍽하게 고인 웅덩이를 밟으며, 우람차게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소리를 아름다운 음악인양 즐겨 들으면서 가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다. 능선에 올라서니 바로 가까이에 있는 암봉도 구름에 휩싸여 형체를 분간할 수 없고, 자그마한 암봉 바위 틈새로 피어있는 진달래는 방울방울 송송 맺힌 물방울을 온 몸으로 가득 안고, 지나가는 바람결에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파르르 떨고 있다. 구름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구름을 타고 구름 위를 걸어가는 마치 내가 신선이라도 된 기분이다.
이윽고 출발한지 반시간이 채 못 되어 구름다리에 도착했다. 지상 120m 높이에 길이 52m 폭 60㎝인 이 다리는 여러 사람이 지날 때 약간의 흔들림이 있어 아슬아슬한 스릴감을 맛볼 수 있었다. 오늘은 지척을 알 수 없는 구름 때문에 바로 아래 깊은 골짜기가 보이지 않아 별 무서움 없이 지날 수가 있었다. 구름다리를 건너 비좁은 바위 틈새를 비집고 바위 등에 올라 잠시 땀을 식히며 숨을 좀 고른다. 사방이 구름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아 갑갑하기만 한데 바람마저 거의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계속 반복되는 가파른 철계단은 오르고 또 올라도 끝이 없다.
12시 24분, 해발 640m(천황봉 1.5㎞ 구름다리 0.4㎞) 재를 오르니 잠시 내리막길이 나타나 좀 수월한 가 했더니 금새 오르막이 나타나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매봉, 연실봉 그리고 사자봉-구름이 감싸고 있어 제대로 볼 수 없었음-을 돌아 반시간을 넘게 걸려서야 비로소 바람골에서 오르는 삼거리(천황사 2.5㎞, 천황봉0.2㎞, 구름다리 1.4㎞)에 다다른다. 이제 정상은 200m 밖에 남지 않아 힘이 부쩍 솟구친다. 곧 이어 통천문(정상 0.1㎞, 구름다리 1.7㎞)을 지나 13시 5분, 드디어 천황봉에 우뚝 섰다.
정상에 올라서니 바람이 불어 시원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져 윈드재킷을 꺼내 입었다. 정상에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면서 정담을 나누느라 분주하다. 우리 일행이 다 올라오기 전에 자리라도 잡으려하나 마땅한 장소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몇몇이 끼리끼리 모여서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에서 고수레를 하고 마시는 한 잔의 술이 올라오느라 지친 몸의 피로를 한순간에 확 날리는 것 같았다. 여전히 구름이 우리들을 감싸고 있어 사방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가까이 있는 사람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14시 27분, 정상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가슴에 안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서둘러 하산차비를 한다. 통천문을 지나서 갈림길에서 바람골로 하산한다. 바람폭포가 가까워지자 폭포의 물소리가 점점 커진다.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폭포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흐린 날이라 쏙 마음에 드는 그림은 아닐지라도 여길 다녀간 추억은 충분히 간직할 수 있기에 가능한 잘 담으려고 애쓴다. 계속되는 내리막길은 그리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내려온다. 구름다리로 오르는 갈림길을 지나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잠시 조각공원에 들러 녹색 바탕에 서있는 예술품을 감상하면서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한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니 월출산 정상의 그 웅장한 자태는 구름 속에 묻혀 끝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 못내 아쉬움만 간직한 채 버스에 올랐다.